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문단 편집) ==== 쓰러져가는 [[동로마 제국|로마]], 떠오르는 오스만 ====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십자군]]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점령당한다. 이 때를 기점으로 [[동로마 제국]]은 멸망이 확실해졌다. 하지만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것은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킬 목적은 아니었다. 이는 돈으로 귀결되는 여러 사정이 계속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어 나온 결과물이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제위 계승 문제로 시끄러웠다. [[알렉시오스 3세|삼촌]]에 의해 쫓겨난 황태자 알렉시오스(훗날의 [[알렉시오스 4세]])는 십자군에게 거액의 전쟁비용 부담, 성지 수호를 위한 병력 파견, 동-서 교회 대통합이라는 그럴 듯한 조건을 제시해 자금난에 허덕이던 십자군을 낚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십자군은 육지의 강력한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뚫는 대신 골든혼 만 주변의 성벽을 공격하는 전략으로 콘스탄티노플 점령에 성공한다.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공격에 대해 동로마에 대한 우호적인 역사가와 십자군의 '순수성'이 부정당한 것을 우려한 역사가들이 쌍으로 십자군을 매수했다는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하지만, 실제 역사적 사실들이 으레 그렇듯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공격은 그렇게 단순하게 결론지을 수 없는 복잡할 수 없는 복잡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제4차 십자군 원정]] 문서를 참고할 것.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공치제|공동 황제]]가 되는 황태자, 즉 알렉시오스 4세는 십자군에게 약속했던 것들을 지킬 능력이 없었다. 제국의 금고는 텅텅 비어있는 상태였다.[* [[알렉시오스 3세]]가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기 전에 금고를 털고 갔기 때문이다. 이후 [[알렉시오스 3세]]는 자신의 동생과 조카가 살해당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이후에도 계속 십자군에 저항하다가 1204년 7월에 십자군에 체포된다.] 그리고 십자군에게 약속했던 돈을 지불하기 위해 교회의 재산에까지 손을 대기에 이른다. 여기에 '동서 교회의 통합'이라는 제국 신민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던 일까지 알려지자 시민들의 분노가 황제를 향하게 됐다. 혼란이 계속되는 와중에 알렉시오스 4세가 살해당하고, 반 십자군 성향의 알렉시오스 5세가 즉위했다. 알렉시오스 5세는 전 황제가 십자군과 맺었던 협약의 이행을 거부했다. 그로 인해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재침공하여, 제국을 멸망시키고 [[라틴 제국]]을 설립한다. 그렇게 로마 제국의 역사가 끝을 내리는 듯 했다. 하지만 망명 세력들은 [[니케아 제국]], [[트라페준타 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을 세운다. 이 중 니케아 제국의 황제 [[미하일 8세]]가 내부의 도움을 받아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게 된다. 이로써 [[괴뢰국]]이나 다름없던 [[라틴 제국]]은 멸망했고, 로마 제국은 다시 부활한다. 그런데 미하일 8세는 오랫동안 니케아 제국에서 군림해왔던 [[라스카리스 왕조]]를 타도하고 즉위한지라 정통성이 부족했다. 때문에 미하일 8세는 자신의 지지 기반을 위해 영지와 자금을 탕진했다. 이는 니케아 제국의 본거지인 [[소아시아]] 방면의 신민들과 유력자의 불만을 사게 됐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재건하기 위해 투입한 비용 충당을 위해 높은 세금을 때렸는데, 이에 후계자인 [[안드로니코스 2세]]는 국방력 약화를 감수하고서라도 감세 정책을 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시점이 오스만 베이국이 창건된 때와 딱 겹쳐 버렸다. 결국 동로마의 제위를 이은 니케아 제국의 본거지는 오스만 베이국에게 점령당하게 되어 가장 중요한 경제적 중심지인 [[아나톨리아]] 반도의 땅을 잃게 된다. 또한 북쪽에서는 [[세르비아 왕국(1217년~1346년)|세르비아]]가 [[세르비아 제국|제국]]을 선포하면서 [[그리스]] 북부를 거의 전부 점령하면서 영토를 크게 잃었다. 거기에 더해 14세기 중반 동로마 제국을 휩쓴 [[흑사병]]으로 인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구의 절반이 사망하면서 제국은 더욱 허약해져, 진짜 당장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한편 그 즈음 [[몽골 제국|몽골]]이 휩쓸고 간 폐허에서 일어난 오스만 베이국은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반도를 휩쓸어 버린다. 2대 베이 [[오르한|오르한 가지]]는 [[팔레올로고스 내전|동로마 제국의 내전]]을 이용하여 [[갈리폴리]] 반도에 교두보를 마련했고, 이후 오스만은 갈리폴리에 마련한 교두보를 통해 발칸 반도로 세력을 확장했다. 특히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무라트 1세|술탄]]이 전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군을 사실상 무찔렀다.[* 전투 자체는 무승부였으나, 오스만 술탄국에게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주둔군이 있었던 반면 세르비아에게는 남은 병사가 없었다. ~~그럼 전쟁에 승리한 거네~~] 이후 오스만은 [[세르비아 공국|세르비아]]와 [[불가리아 제2제국|불가리아]]를 잇따라 개박살시키며 승승장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